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다. 끝 모르는 탐욕과 물신 의 현시대와 인간 존재의 심연을 향해 도저(道底) 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악령과 신성, 그 분리할 수 없는 양면성을 지닌 고뇌에 찬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도전이다.
1990년 ‘김영현 논쟁’을 부르며 민중소설의 지평을 연 김영현(52)씨의 신작이다. ‘폭설’ 이후 4년 만이다.
소설은 조용한 소읍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전직 마을금고 이사장 최문술이 자기 집에서 칼에 찔린 뒤 목 졸려 죽었다. 그의 두번째 아내 성경애가 발견, 신고한다.
강력계 반장 장국진은 탐문 끝에 최문술의 전처 소생 큰아들 최동연을 떠올린다. 최동연은 존속살해범으로 체포된다. 그러나 최문술의 49재에 둘째 아들이자 최동연의 동생인 성연이 나타나면서 종결된 사건은 새 국면을 맞는다.
수도원 신학교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성연은 처음부터 동연이 범인일 리 없다고 확신, 홀로 사건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최문술의 추악한 과거가 드러난다. 여기에 형 동연도 깊이 개입돼 있음을 알게 된다.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 했던 성연은 고뇌와 번민으로 괴로워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을 뿐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늘 일회적이고 덧없는 생의 너머에 그 무언가, 신이든 별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이든,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그것을 헤겔 식으로 이성(reason)이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라고 믿기도 했고, 때로는 초월적인 어떤 것, 우주의 심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절대적인 자유 같은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한, 마치 유리병 속의 나방처럼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한계에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시절, 나는 한때 ‘이성’의 힘을 믿었다. 혹독한 고문과 단식을 하면서도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이성에 대한 믿음조차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진보는 하나의 허상이며 가나안처럼 허황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회의와 함께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 혹은 완전한 해방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는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차라리 탐욕과 악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훨씬 가까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모든 경전은, 성경을 포함하여, 인류가 지닌 탐욕과 피의 기록 이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카인의 낙인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의 이마 위에 찍혀 있는 잠재된 살인 충동의 상징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여 나는 생각했다. 나의 생은 이 벗어날 수 없는 무의미함과의 대결이었다고. “나의 생은 과연 가치 있는 그 무엇일까?” “나는 과연 이 맹목적인 생의 의지로부터 최소한의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불을 찾아갔던 태고의 인류들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별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김씨는 1984년 창작과비평사 14인 신작소설집에 단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소설 ‘풋사랑’ ‘폭설’, 시집 ‘겨울바다’ ‘남해엽서’ ‘그후, 일테면 후일담’, 시소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90년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악령과 신성, 그 분리할 수 없는 양면성을 지닌 고뇌에 찬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도전이다.
1990년 ‘김영현 논쟁’을 부르며 민중소설의 지평을 연 김영현(52)씨의 신작이다. ‘폭설’ 이후 4년 만이다.
소설은 조용한 소읍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전직 마을금고 이사장 최문술이 자기 집에서 칼에 찔린 뒤 목 졸려 죽었다. 그의 두번째 아내 성경애가 발견, 신고한다.
강력계 반장 장국진은 탐문 끝에 최문술의 전처 소생 큰아들 최동연을 떠올린다. 최동연은 존속살해범으로 체포된다. 그러나 최문술의 49재에 둘째 아들이자 최동연의 동생인 성연이 나타나면서 종결된 사건은 새 국면을 맞는다.
수도원 신학교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성연은 처음부터 동연이 범인일 리 없다고 확신, 홀로 사건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최문술의 추악한 과거가 드러난다. 여기에 형 동연도 깊이 개입돼 있음을 알게 된다.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 했던 성연은 고뇌와 번민으로 괴로워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을 뿐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늘 일회적이고 덧없는 생의 너머에 그 무언가, 신이든 별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이든,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그것을 헤겔 식으로 이성(reason)이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역사라고 믿기도 했고, 때로는 초월적인 어떤 것, 우주의 심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절대적인 자유 같은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한, 마치 유리병 속의 나방처럼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한계에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시절, 나는 한때 ‘이성’의 힘을 믿었다. 혹독한 고문과 단식을 하면서도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이성에 대한 믿음조차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진보는 하나의 허상이며 가나안처럼 허황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회의와 함께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 혹은 완전한 해방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는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차라리 탐욕과 악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훨씬 가까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모든 경전은, 성경을 포함하여, 인류가 지닌 탐욕과 피의 기록 이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카인의 낙인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의 이마 위에 찍혀 있는 잠재된 살인 충동의 상징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여 나는 생각했다. 나의 생은 이 벗어날 수 없는 무의미함과의 대결이었다고. “나의 생은 과연 가치 있는 그 무엇일까?” “나는 과연 이 맹목적인 생의 의지로부터 최소한의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불을 찾아갔던 태고의 인류들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별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김씨는 1984년 창작과비평사 14인 신작소설집에 단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소설 ‘풋사랑’ ‘폭설’, 시집 ‘겨울바다’ ‘남해엽서’ ‘그후, 일테면 후일담’, 시소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90년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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