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잃고 새삶을 찾아 밀양 온 신애
얼마 안돼서 한줌 재가 돼 버린 아들
절망하는 그녀 앞에 종찬은 다가서고
영화배우 전도연을 ‘칸의 여왕’으로 등극시킨 영화 ‘밀양’은 남편과 아이까지 모든 것을 잃은 신애가 삶의 고통으로 만신창이가 된 뒤부터 희망에 접근해 가는 이야기다.
사랑을 잃고 상처 받은 신애(전도연)는 새 삶을 위해 밀양을 찾는다.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며 희망에 담금질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안 돼 유일한 희망인 아들을 잃으면서 삶의 의미마저 완전히 빛을 잃는다.
신애는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소리 내 울지도 숨 쉬지도 못하면서 슬픔과 고통으로 뒤범벅된 삶을 연명한다. 그러다 기독교를 접하며 신을 통해 ‘왜 사는 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종국의 희망은 아니었다.
영화는 끝없이 확대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과 아픔, 슬픔 속에서, 눈물겹게 끄집어내는 한 줄기 ‘희망’을 툭하고 내던진다. ‘희망’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처절한 현실 속의 사람들이 극복하는 힘이다.
그것이 딱히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거나, 어떻게 해야 끌어안을 수 있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이 감독은 영화에서처럼 ‘삶의 의미’와 ‘희망’, ‘구원’에 관한 정의는 관객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에 관한 영화”라며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이 이니라,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피가 돌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경이롭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살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를 가로지르는 따사로운 햇살이나, 살을 애는 듯 사막에 내뢰 쬐는 햇볕은 모두 ‘태양 볕’이다. 영화가 담은 것은 후자에 가깝다. 허나 사막에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지만, 반드시 나타난다는 희망, 즉 ‘오아시스’가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절망하는 여인 옆에서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전달하는 카센터 사장(송강호)은 첫 번째 ‘오아시스’인 셈이다. 우리내 삶에 경중을 가릴 수 없는 아픔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전도연의 연기다.
극중 신애가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부들부들 떨고, 교회 안에서 슬픔이 폭발해 기침을 삼키며, 신을 마주하듯 땅바닥에서 누워 하늘을 향해 외마디를 던지는 모습 등은 오래도록 각인되는 장면들이다. 희망을 잃은 한 여인의 아픔을 바라보며 관객도 그대로 탈진할 지경이다.
칸 시사회 후 한 홍콩 여기자가 “신애를 연기하면서 그 시기에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는 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던질 정도였다. “덕분에 남편에게 더욱 의지하게 됐다”는 것이 전도연의 수줍은 고백이다. 하지만 ‘밀양’은 배우가 된 이래 처음으로, 감정연기가 안 돼 먼저 촬영 중단을 요청했던 선례를 남긴 힘든 여정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이 영화가 칸에 공개됐을 때, 작품성에 대한 의견은 다양했다. “수작이다”, “그저 그랬다”는 평과 함께 “인간의 아픔을 노래한 영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여정을 그린 작품”이란 식의 다양한 시각이 공존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밀양’은 한국영화를 대표, 60돌을 맞은 칸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얼마 안돼서 한줌 재가 돼 버린 아들
절망하는 그녀 앞에 종찬은 다가서고
영화배우 전도연을 ‘칸의 여왕’으로 등극시킨 영화 ‘밀양’은 남편과 아이까지 모든 것을 잃은 신애가 삶의 고통으로 만신창이가 된 뒤부터 희망에 접근해 가는 이야기다.
사랑을 잃고 상처 받은 신애(전도연)는 새 삶을 위해 밀양을 찾는다.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며 희망에 담금질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안 돼 유일한 희망인 아들을 잃으면서 삶의 의미마저 완전히 빛을 잃는다.
신애는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소리 내 울지도 숨 쉬지도 못하면서 슬픔과 고통으로 뒤범벅된 삶을 연명한다. 그러다 기독교를 접하며 신을 통해 ‘왜 사는 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종국의 희망은 아니었다.
영화는 끝없이 확대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과 아픔, 슬픔 속에서, 눈물겹게 끄집어내는 한 줄기 ‘희망’을 툭하고 내던진다. ‘희망’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처절한 현실 속의 사람들이 극복하는 힘이다.
그것이 딱히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거나, 어떻게 해야 끌어안을 수 있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이 감독은 영화에서처럼 ‘삶의 의미’와 ‘희망’, ‘구원’에 관한 정의는 관객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에 관한 영화”라며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이 이니라,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피가 돌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경이롭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살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를 가로지르는 따사로운 햇살이나, 살을 애는 듯 사막에 내뢰 쬐는 햇볕은 모두 ‘태양 볕’이다. 영화가 담은 것은 후자에 가깝다. 허나 사막에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지만, 반드시 나타난다는 희망, 즉 ‘오아시스’가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절망하는 여인 옆에서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전달하는 카센터 사장(송강호)은 첫 번째 ‘오아시스’인 셈이다. 우리내 삶에 경중을 가릴 수 없는 아픔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전도연의 연기다.
극중 신애가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부들부들 떨고, 교회 안에서 슬픔이 폭발해 기침을 삼키며, 신을 마주하듯 땅바닥에서 누워 하늘을 향해 외마디를 던지는 모습 등은 오래도록 각인되는 장면들이다. 희망을 잃은 한 여인의 아픔을 바라보며 관객도 그대로 탈진할 지경이다.
칸 시사회 후 한 홍콩 여기자가 “신애를 연기하면서 그 시기에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는 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던질 정도였다. “덕분에 남편에게 더욱 의지하게 됐다”는 것이 전도연의 수줍은 고백이다. 하지만 ‘밀양’은 배우가 된 이래 처음으로, 감정연기가 안 돼 먼저 촬영 중단을 요청했던 선례를 남긴 힘든 여정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이 영화가 칸에 공개됐을 때, 작품성에 대한 의견은 다양했다. “수작이다”, “그저 그랬다”는 평과 함께 “인간의 아픔을 노래한 영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여정을 그린 작품”이란 식의 다양한 시각이 공존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밀양’은 한국영화를 대표, 60돌을 맞은 칸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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