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작가?미술칼럼니스트)
“뭐해!”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형이 동생에게 묻는다.
“형아 왔네! 나 그림 그려, 말 그림.”
“짜쌰! 그게 어떻게 말이냐. 너 말 알지. 몸뚱아리에 꽁지 있고 다리가 네 개 달려 있어서 들판을 막 달리는 말 말이야. 동물원에 가 봤자나. 꼬랑지는 엄마 머리 묶은 거 같이 막 흩날리고, 다리는 길고 한 거. 너 내 말 알지.”
“.....”
“아니, 그거 말고. 책 가꼬 와바. 여기 이렇게 생긴 거가 말이자나. 니 껀 말이 아니라 개다 개. 다리 짧고 뚱뚱한 거.”
초등학교 2학년은 더 이상 말 그리기가 곤란해져 버린다.
형이 말하는 말은 형의 것이고 자기 말은 자신의 가슴에 있다.
머리와 몸통과 다리만 있어도 머릿속에는 포카혼타스의 말이 되어 들판을 달리고 있다.
형의 말과 자신의 말은 머릿속에서만 같다.
녀석은 더 이상 말을 그리지 못한다. 누구를 위한 그림인가?
언젠가 미술 이벤트 마당에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미술 교실’을 맡아본 경험이 있다.
관람을 마친 부모님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아이의 감성을 표현하는 부분을 이야기 했었다.
여러 명의 아이와 어머니들에게 아빠의 술 냄새를 그려보라고 했다.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은 아이는 칠을 하거나 형태를 그리거나 뭔가를 그려냈다.
그러나 미술학원을 다녔던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엄마더러 아이를 꼭 안아주라고 한 다음, 아이들에게 엄마의 사랑을 그려보라고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자유롭게 형태를 그리거나 색깔로 표현하는 아이들은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미술학원을 다녔던 유치원 아이들과 초등학생들은 모두 하트 모양을 그렸다.
우리는 이미 감성 그리기를 잊어먹었다.
미술학원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엄마를 위한 학원이다.
아이의 감성을 가르치기보다는 엄마가 맘에 들어 하는 예쁜 그림을 그리게 한다.
사회가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못하게 감성을 막아버린 것이다.
어떤 화가의 작품 활동은 경제 활동 지원해 주는 화랑을 위한 것인가.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해 주고 구매해 주는 구매자의 것인가.
그림은 화가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미술품은 감성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당장 아이의 책상서랍을 뒤져서 크레용을 찾아 그림을 그려보자.
누가 보면 창피하니까 아무도 없을 때 그리자.
가족의 사랑을 그려보자.
뭘 그려야 될지 모르겠다면 주말에 아이와 함께 인사동을 찾아가 보자.
자신과 아이를 위하여 그림을 구경해 보자.
아이의 정서보다는 자신의 정서를 위해 그림을 구경해 보자.
자주 보면 아빠의 술 냄새와 엄마의 사랑이 보인다.
자기가 그리지 못한 가족의 사랑이 그려진 그림도 보인다.
그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그림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간 셈이 된다.
신주호의 ‘세상 속에서’는 변형된 연꽃의 이미지를 화면 가득히 배치하면서 연꽃이 피면 물속의 안 좋은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는 계향충만(戒香充滿)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연꽃이라는 불교적 의미와 함께 현대사회 안에서 세상 허물에 물들지 말고 바른 자신의 모습과 향기를 그대로 지켜 나가야 한다는 뜻을 담아 표현한 작품이다.
“뭐해!”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형이 동생에게 묻는다.
“형아 왔네! 나 그림 그려, 말 그림.”
“짜쌰! 그게 어떻게 말이냐. 너 말 알지. 몸뚱아리에 꽁지 있고 다리가 네 개 달려 있어서 들판을 막 달리는 말 말이야. 동물원에 가 봤자나. 꼬랑지는 엄마 머리 묶은 거 같이 막 흩날리고, 다리는 길고 한 거. 너 내 말 알지.”
“.....”
“아니, 그거 말고. 책 가꼬 와바. 여기 이렇게 생긴 거가 말이자나. 니 껀 말이 아니라 개다 개. 다리 짧고 뚱뚱한 거.”
초등학교 2학년은 더 이상 말 그리기가 곤란해져 버린다.
형이 말하는 말은 형의 것이고 자기 말은 자신의 가슴에 있다.
머리와 몸통과 다리만 있어도 머릿속에는 포카혼타스의 말이 되어 들판을 달리고 있다.
형의 말과 자신의 말은 머릿속에서만 같다.
녀석은 더 이상 말을 그리지 못한다. 누구를 위한 그림인가?
언젠가 미술 이벤트 마당에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미술 교실’을 맡아본 경험이 있다.
관람을 마친 부모님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아이의 감성을 표현하는 부분을 이야기 했었다.
여러 명의 아이와 어머니들에게 아빠의 술 냄새를 그려보라고 했다.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은 아이는 칠을 하거나 형태를 그리거나 뭔가를 그려냈다.
그러나 미술학원을 다녔던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엄마더러 아이를 꼭 안아주라고 한 다음, 아이들에게 엄마의 사랑을 그려보라고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자유롭게 형태를 그리거나 색깔로 표현하는 아이들은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미술학원을 다녔던 유치원 아이들과 초등학생들은 모두 하트 모양을 그렸다.
우리는 이미 감성 그리기를 잊어먹었다.
미술학원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엄마를 위한 학원이다.
아이의 감성을 가르치기보다는 엄마가 맘에 들어 하는 예쁜 그림을 그리게 한다.
사회가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못하게 감성을 막아버린 것이다.
어떤 화가의 작품 활동은 경제 활동 지원해 주는 화랑을 위한 것인가.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해 주고 구매해 주는 구매자의 것인가.
그림은 화가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미술품은 감성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당장 아이의 책상서랍을 뒤져서 크레용을 찾아 그림을 그려보자.
누가 보면 창피하니까 아무도 없을 때 그리자.
가족의 사랑을 그려보자.
뭘 그려야 될지 모르겠다면 주말에 아이와 함께 인사동을 찾아가 보자.
자신과 아이를 위하여 그림을 구경해 보자.
아이의 정서보다는 자신의 정서를 위해 그림을 구경해 보자.
자주 보면 아빠의 술 냄새와 엄마의 사랑이 보인다.
자기가 그리지 못한 가족의 사랑이 그려진 그림도 보인다.
그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그림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간 셈이 된다.
신주호의 ‘세상 속에서’는 변형된 연꽃의 이미지를 화면 가득히 배치하면서 연꽃이 피면 물속의 안 좋은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는 계향충만(戒香充滿)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연꽃이라는 불교적 의미와 함께 현대사회 안에서 세상 허물에 물들지 말고 바른 자신의 모습과 향기를 그대로 지켜 나가야 한다는 뜻을 담아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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