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성서침례교회 김우생 목사
사람들은 기뻐하는 삶은 우연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삶은 부지런히 추구하여 얻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에게 행복한 웃음을 가져다 주는 경우는 드물며 오히려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은 찾아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갖추어지기만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기쁨을 모르고 웃음도 잃고 살아 갈 것입니다. (빌4:8)
바울사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본보기입니다.
바울은 네로(Nero) 황제 앞에서 그의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해 전파자로 설교자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수로 로마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으로 가이사(Caesar)에게 호소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청중도 예비 되도록 요구할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불법으로 체포 되어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로 가는 도중에 광풍을 만나 배가 파선 되는 일도 겪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2년간 세집에 연금 되어 갇혀 있기도 했었습니다.
“희생제물”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바울 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곳에서 신약에서 가장 기쁨이 넘치는 서신을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빌1:12~14) 바울은 “그의 당한 일” 때문에 분개하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상처를 만지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로마의 군인과 사슬에 매인 채 갇혀있으면서 그의 환경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의 단어나 술어는 다채롭습니다. 진보- prokope(프로코페)- 는 개척한다는 공병대 술어입니다. ‘숲의 나무를 자르고 행군할 수 있는 길을 예비 한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일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 전해지도록 예비한 길이 되었습니다. 그의 옆에서 그를 감시하거나 그와 함께 사슬에 매여 있는 군인들을 바라볼 때 “복음의 장애”로 보지 않고 “포로 된 청중”으로 보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임무교대를 한 군인들은 그들의 동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3절)
"시위대“는 로마황제의 근위병들로 궁전을 호위하며 황제의 죄수들을 지키는 군인들로 엘리트 군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당한 일로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초조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복음을 전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부정적인 질문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를 생각하지만 긍정적인 질문은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고 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그를 노예로 애굽에 팔았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20)
바울은 실망하게 한 것들을 열거하기보다는 축복을 헤아려보려고 결심했습니다. 긍정적인 태도를 선택하였습니다.
모세도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서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요구를 하나님께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매여 있음으로 바울을 괴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빌1:15) 1c 초대교회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 중에 순수한 동기로 하지 아니한 사람들도 있었고 착한 뜻으로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 행동이 기쁨을 빼앗아가고 한 사람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해지면 된다는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복음을 전했는가 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는가에 더욱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이 전해졌을 때는 단호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메시지가 잘못 되었을 경우 책망하여야 하며 폭로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메시지가 아니라 메시지를 사람이 잘못 되었을 경우는 그 사람을 바로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분명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살게 될지 아니면 곧 죽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불확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근본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삶으로 살기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환경에 매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하는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평이나 공격을 개인적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 했지만 분명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빌1:21)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도적은 환경과 사람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러나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처한 환경의 차원을 높이십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건져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잔잔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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